시계바늘은 벌써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미유키는 부엌 테이블 앞에 앉아 조용한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가볍게 거실 쇼파로 던졌다. 아무 소리도 없이 쇼파에 파묻힌 휴대폰이 왠지 자기 꼴을 보는 것만 같아 미유키는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테이블 한쪽에 세워둔 샴페인과 오랜만에 꺼낸 와인 잔 두 개로 시선을 옮겼다가 그 가운데에 놓인 포장된 상자에 시선이 닿자 괜히 마음 한 구석이 꽁하니 굳어져 답답한 기분이었다.

 

잡은 물고기엔 이제 미끼를 안 준다 이거냐…”

 

허탈하게 혼잣말을 해보지만 오늘 저녁 생선 아닌데요? 하고 돌아오는 멍청한 대답은 없다. 내가 왜 이렇게 됐지. 미유키는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3년 전 이 맘 때, 시선도 온전히 맞추지 못하고 바닥에 고개를 쳐 박고 있으면서도 초콜릿 상자를 내민 두 손만은 떨리지 않던 사와무라를, 미유키는 기억한다. 사와무라의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난 후, 야구부원들끼리 예약한 식당으로 우르르 몰려가던 중 할 말이 있다고 교정 뒤편으로 미유키를 불러냈던 것도 그는 기억한다. 원래는 미유키가 졸업하던 작년에 고백하려다가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용기를 못 냈다고 했다. 올해가 지나면 영영 못 보게 될까 봐 덜컥 겁이 났다고도 했다. 9회 말 무사 만루에서 던지는 것마냥 부여 잡은 초콜릿 상자의 포장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려서 미유키는 그 상자와 그 마음을 받아 들었다. 잔뜩 구겨진 포장지처럼 잔뜩 구겨진 얼굴을 한 사와무라가 얼굴을 들었을 땐 웃어버리고 말았지만. 그 직후 사와무라는 왜 웃슴까!! 하고 외치면서 엉엉 울었더랬다.

 

미유키의 기억은 그 다음 해 발렌타인 데이로 이어졌다.

2년 전 이 맘 때, 손수 만든 초콜릿 케이크를 내밀던 사와무라를, 미유키는 기억한다. 선배는 단 거 별로 안 좋아하니까 럼주 넣어서 안 달게 만들었어요.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조금 미안해졌던 것도 미유키는 기억한다. 기념일 같은 건 챙기지도, 따로 기억하지도 않는 미유키와는 달리 사와무라는 순 남자다운 성격과는 매우 다르게도 100일이니 200일이니 이것 저것 챙기곤 했었다. 그리고 발렌타인 데이는 미유키와 사와무라가 사귀기 시작한 지 1주년이 되는 날이었으니, 사와무라가 준비한 것은 대단했다. 꽤 괜찮게 구워진 스테이크를 자르며, 진득하니 달아 보였던 초콜릿 케이크를 한 입 먹으며, 미유키는 사와무라에게 마음 속으로 사과했다.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은 게 미안했지만 사와무라는 그런 미유키에게 괜찮다며 씨익 웃을 뿐이었다.

 

미유키의 기억은 그 다음 해 발렌타인 데이로 이어졌다.

작년 이 맘 때, 뮤지컬 A석 티켓 두 장을 내밀던 사와무라를, 미유키는 기억한다. 시간이 없어서 올해는 이걸로 퉁침다!! 하고 웃으면서 공연장으로 향했던 사와무라가 뮤지컬이 끝난 직후에는 눈이 새빨개졌던 것도 미유키는 기억한다. 그 날 저녁은 미유키가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미유키가 아는 후배가 못 가게 됐다며 넘겨준 것이었지만 사와무라는 꽤 기뻐 보였다. 레스토랑에서 발렌타인 데이 기념으로 나온 초콜릿을 깨물며, 같이 곁들어 나온 커피를 한 모금 머금으며, 미유키는 이 정도면 합격점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와무라는 간이 전체적으로 싱겁긴 했지만 맛있었다고 평하며 그 날 봤던 뮤지컬 얘기를 식사 내내 조잘 조잘 늘어놓았다.

 

그리고 미유키의 기억은 현재로 돌아왔다.

대학 야구부 선배들과 술자리가 있을 것 같다고 사와무라가 말을 꺼낸 게 이틀 전 아침이었다. 최대한 빨리 빠져 나오겠다고 약속하는 얼굴에 별로 신경 안 쓴다고 대답했던 것 같은데. 미유키는 침착하게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분명히 먼저 고백한 것도 사와무라고, 더 정성을 쏟은 것도 사와무라일 텐데 언제부터 늘 여유 있던 자신이 전전긍긍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째깍 째깍 흘러가는 시계 소리를 배경 삼아 그대로 지난 3년 간의 연애를 반추하던 미유키는 부르르 울리는 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쇼파 쿠션 사이에 파묻힌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쇼파로 뛰어가듯 다가선 미유키가 휴대폰을 집어 들고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선배, 저 지금 갈게요~~]

어딘데?”

[? 집 앞!]

집 앞이라고?”

[, 이제 다 왔슴다~~]

 

한적한 주택가라고 생각할 수 없는 소음이 사와무라의 말 위로 뒤덮였다. 미유키는 쇼파에 걸쳐 두었던 코트를 한 손으로 주섬 주섬 껴 입었다. 휴대폰을 다른 손으로 옮기고 코트에 팔을 꿰는데, 사와무라가 혼자 신나서 말을 이어간다.

 

[선배! 초콜릿 뭐 사갈까요?]

거기 그대로 있어!”

[, 발렌타인 데이잖슴까! 초콜릿~~]

사와무라!”

 

한 쪽 손으로 주머니를 뒤져 차 열쇠와 지갑을 확인하고, 미유키는 운동화 뒤축을 밟아 신고 현관문을 열었다. 전화 건너 사와무라의 목소리가 네엡! 하고 경쾌하게 대답하는 것과 함께 미유키는 시동을 걸었다. 휴대폰을 핸즈 프리로 전환하고 확인한 시간은 11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미유키는 급히 액셀을 밟았다. 역 앞 벤치에서 어느 초콜릿을 사 갈 지 혼자 의논하고 있을 바보 같은 연인을 오늘 중으로 데려오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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